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를로스 2세 (문단 편집) === 스페인의 쇠퇴 === 국왕의 상태가 무척 나빴음에도 국정 운영이 가능했던 건 모후 마리아나[* 부계로만 따지자면 카를로스에게 마리아나는 '''고종사촌 누나'''였다.]가 섭정으로서 10년간 통치했기 때문이었다. 카를로스의 이복형이자 [[펠리페 4세]]의 사생아 [[돈 후안 호세|돈 후안 호세 데 아우스트리아]][* 카를 5세의 사생아인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와 동명이인이기 때문에 보통 미들네임인 호세까지 같이 표기한다. 영미권에선 John of Austria '''the Younger'''로 표기하여 카를 5세의 사생아인 돈 후안보다 후세의 인물임을 강조한다.]는 이걸 아니꼽게 봤다.[* 당시 돈 후안과 마리아나는 서로 싫어하여 관계가 굉장히 안 좋았다. 심지어는 돈 후안이 이복동생 카를로스 2세의 추천으로 국왕 자문이 되었을 때 마리아나가 아들에게 압력을 넣어 취소시킬 정도였다.] 결국 돈 후안은 군대와 귀족들의 도움으로 마리아나를 축출하고 권력을 잡았다.[* 이는 마리아나가 섭정이었으나 총신인 발렌수엘라를 재상에 임명하여 정치를 맡겼는데 재상이 된 발렌수엘라가 전횡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특히 발렌수엘라는 일부러 궁전에 파티를 자주 열어 대비의 관심을 정치에서 돌렸고, 정부위원회의 위원 2명을 파면하고, 나중에는 아예 정부위원회를 해산시켜 버릴 정도로 권력을 남용했다. 귀족들은 이에 반발하면서 돈 후안을 지지했다. 그래서 돈 후안이 군대를 이끌고 마드리드로 입성하여 발렌수엘라를 체포하고, 마리아나를 [[톨레도]]로 추방했다.] 그는 카를로스 2세에게 그리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아서 머리만 빗고 나오라고 부탁했고, 통치는 본인이 했다.[* 이때 섭정이 된 후안은 사치를 금지하고 생필품 공급을 정상화시키며 상공위원회를 창설하여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등 뛰어난 정치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섭정이 된 지 3년 만인 1679년에 후안이 사망하자 다시 마리아나가 권력을 잡게 되었다. 만 19세가 되는 해인 1680년에 종교재판이 열렸는데 이때 카를로스 2세는 교회가 종교재판을 하는 것을 묵인하여 120명이 체포되고 그중 21명이 화형당한 것을 사실상 모른체 했다. 스페인 종교 재판이라는 게 세간의 상상과 달리 종교 재판소 설립 초기와 종교 개혁 초기 시절에나 열정적으로 활동했지, 그 시대의 대부분은 대규모의 체포나 탄압을 벌일 능력도, 의지도 없는 기관이었다. 오히려 실질적으로는 당시 교회의 관할이었던 결혼 문제, 즉 [[가정법원|상속과 이혼소송을 전담하는 기관]]이라 평소에는 '아 그런 기관도 있었지' 하는 식으로 스페인 사회의 일상에서나 정계에서나 그리 설치지 않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국왕의 방관 아래 교회 권력자들의 내분이 결국 종교 재판소의 대대적인 동원을 야기하여 스캔들이 된 것이다. 이후에 귀족들의 압력을 받아 진상조사 위원회를 구성하였는데 이 위원회가 내린 결론은 무능한 카를로스 2세가 종교재판소의 말에 혹하여 무고한 사람들이 처형되도록 방조하였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카를로스 2세는 병약하여 실질적으로 통치를 하지 못했으므로, 오히려 당시의 섭정 및 관료들에게 원인이 있다고 보는 편이 맞다. 그래도 통치를 아예 못할 정도의 상태는 아니었는지 섭정 모후가 물러난 후 카를로스 2세는 드디어 친정을 시작하였다. 사실 카를로스 2세 이전의 스페인 국왕들은 정사를 직접 보지 않고 총신들에게 나라를 맡겼지만, 이 체제는 행정 체제의 심각한 부패를 야기했다. 이를 혁파하기 위해 카를로스 2세는 총신을 두지 않고 직접 정무를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위 관료들과 각 지방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데다, 당시 스페인의 경제는 이전 정부들의 실정과 전쟁, 기근 탓에 깊이 침체되어 있었다. 그래서 설령 능력이 좋은 국왕이 정사를 돌보아도 스페인은 나라 형편이 나아지기는 힘들었을 상황이었다. 게다가 국왕 카를로스 본인의 건강이 나쁘고 통치 능력이 따라주지 못해 그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결국 스페인의 무능은 전 유럽에 알려졌으며 [[프랑스 왕국|프랑스]]의 영향력이 강해졌다. 또한 [[카를 5세|카를로스 1세]]가 구축한 [[이탈리아 반도]]의 점령지는 이 시기까지도 유효했으나 카를로스 2세가 자식 없이 사망하면서 이탈리아의 지배권을 상실했다.[* [[위트레흐트 조약]] 때문인데 이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과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 참가해 다시 수복했다.] 결과적으로 국력 탈진 때문에 수세에 몰려가던 [[스페인 제국]]은 몰락하고 말았다. 카를로스 2세는 스페인 쇠퇴의 시작점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21세기의 역사가들은 그에게 심각한 건강 문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부하들이 [[루이 14세]]의 프랑스 권력에 대항하여 제국을 온전하게 유지했다고 평가했다. 또한 이 치세의 역사상 가장 큰 [[디플레이션]] 중 하나인 왕국의 구매력 증가, 공공 금고의 회복, 기아의 종식과 평화를 달성했다. 이러한 성과 때문에 역사학자 루이스 리보트(Luis Ribot)는 그를 "악마에 홀리지도 않았고 퇴폐적이지도 않은" 인물로 평가했다.[[https://es.wikipedia.org/wiki/Carlos_II_de_Espa%C3%B1a|#]] 또한 '합스부르크의 근친상간이 낳은 괴물이자 백치'라는 이미지는 후대에 와서 과장된 측면이 크며, 정작 카를로스 2세와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들은 그를 그 정도로 저평가하지 않았다고 분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